조용필 예전 콘서트 모습. 2022.11.27. (사진 = YPC, 유니버설뮤직 제공) 뉴시스
조용필 예전 콘서트 모습. 2022.11.27. (사진 = YPC, 유니버설뮤직 제공 뉴시스
삶에 노래가 있다는 건, 우리의 일상이 노래가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가왕' 조용필(72)이 26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KSPO DOME·옛 체조경기장)에서 펼친 콘서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은 노래가 "워어! 이렇게 빛나"는 순간을 선사했다.
최근 그룹 '에이핑크' 멤버 겸 솔로가수 정은지가 리메이크한 '꿈'을 시작으로 이날 콘서트의 포문을 연 조용필은 '단발머리' '그대를 사랑해'를 연이어 들려주며 귀환을 알렸다.
조용필은 세 곡을 연달아 부른 뒤 "안녕하세요. 얼마만이에요? 제가 아마 가수 생활 한 이후로 (콘서트를 하지 않은 지)가장 긴 시간이 아닐까 해요. 4년이 40년 같았어요. 그립기도 하고 반갑고 기쁘다"고 벅차했다. 조용필이 콘서트를 연 건 코로나19 이전인 지난 2018년 말 같은 장소에서 펼친 데뷔 50주년 전국투어 콘서트 '땡스 투 유' 이후 처음이다.
조용필이 칠순을 넘겨 처음 연 이날 콘서트는 우리의 지난 기다림이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줬다.
저녁 기온이 0도 가까이 떨어진 이날 날씨였지만 기대감이 가득찬 공연장은 콘서트 시작 전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오후 7시5분 공연장 조명이 꺼졌고 오후 7시10분께 조용필이 상징과도 같은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무대 위에 등장했다.
무대 전면에 돌출된 직사각형 모양의 장치가 처음엔 조용필 콘서트의 상징과도 같은 무빙 스테이지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해당 장치는 무빙 대형 LED 스크린이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공중으로 치솟더니 약 45도 경사로 무대 위에 기울어져서 스펙터클한 정경을 선사했다. 무대 양 옆 대형 스크린을 비롯 크기와 용도가 저마다 다른 스크린 6개가 무대 전면을 꾸몄고 객석 양 천장에도 대형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조용필 콘서트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 외부 모습. 2022.11.26 뉴시스
LED 스크린은 네 번째 곡 '추억속의 재회'에선 마치 심해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장면을 연출해냈다. 파도처럼 일렁이거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실감나는 장면을 구현했다.
'물망초'에 이어 '그대여'를 들려줄 때는 조용필은 직접 기타를 잡고 연주력도 뽑았다. '위대한 탄생' 멤버들인 기타리스트 최희선, 베이시스트 이태윤과 함께 모여 합주하는 모습은 록 밴드의 그것이었다.
이어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스크린에 구현됐고 뮤지컬 '라이온 킹' 무대를 연상케하는 사막이 이어 펼쳐졌다. 이어 지난 18일 공개한 첫 싱글 '로드 투 트웬티-프렐류드 원(Road to 20-Prelude 1)'에 실린 두 신곡 중 한곡인 '세렝게티처럼'를 들려줬다. 라이브로는 첫 공개였다. 무빙 대형 LED 스크린이 대각선으로 내려와 초록빛을 뿜어내며 공연장을 초원으로 만들어냈다.
조용필은 '세렝게티처럼'을 부른 뒤 "좋아요?"라고 객석에 물었다. "항상 녹음할 때는 열심히 해요. 그리고 궁금해하죠. (팬들이) 좋아하실까? 그저 그렇다고 여기실까. 결국 발표하고 나서는 '에라 모르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신곡을 낼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죠"라고 기뻐했다.
객석에서 "부산에서 왔다"고 외치자 "(이번에) 저희가 사실 지방 공연을 하지 못해 아쉬워요. 서울에서만 4일간 하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그런데 지방에 가려면 이 장비를 다 끌고 가야해서 문제가 심각해요. 그래서 여기서만 하게 됐어요. 미안합니다. 지방 각지에서 오셔서 고맙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래요. 오랜만에 보니까 낯간지럽죠? 하하. 오글거리기도 하고요. 여러분과 추억 속에서 재회하는 느낌입니다. 같이 조용한 분위기로 옛날 발라드 들려드리겠습니다."
이후 로킹한 분위기가 잠시 멈췄다. '친구여' '그 겨울의 찻집' '큐(Q)'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등처럼 이날 모인 1만여 관객이 함께 '떼창'할 수 있는 노래들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조용필. 2022.11.18. (사진 = YPC, 유니버설뮤직 제공) 뉴시스
조용필은 잔잔한 노래를 연이어 부른 뒤 객석을 향해 "남성 분들이 몇 퍼센트 정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제 노래 중에서 '지구 위의 반은 남자 / 지구 위의 반은 여자'라는 가사가 있는 노래('여와 남')가 있죠. 오늘 공연장엔 3분의 1이 남성분들인 거 같은데, 의외로 남성 분들이 많아요. (객석에서 '형님'이라고 외치자) 형 여기 있어. 아직 형이에요. 형님 아닙니다"라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트로트 풍으로 시작한 '여와 남'은 중간에 세련된 편곡이 인상적이었는데 조용필의 주문에 따라 남성, 여성 관객이 각각 "지구 위의 반은 남자" "지구 위의 반은 여자"를 합창하기도 했다.
이날 상당수 편곡도 인상적이었다. "엄마야"라는 가사가 귀에 감기는 '고추 잠자리'는 블루스, 신스팝, 팝 록의 편곡을 오갔고 본래도 국악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자존심'은 우리 장단의 리듬이 한층 더 부각됐으며, 스크린을 붉게 물들인 '태양의 눈'의 경우 화끈한 심포닉 밴드를 연상케하는 사운드로 공연장을 꽉꽉 채웠다. 아울러 '자존심'을 들려줄 때 영상엔 단청 이미지들이 수를 놓았다.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의 구수한 리듬, '못찾겠다 꾀꼬리'의 위트 넘치는 편곡 역시 귀에 척척 감겼다. 원곡 자체에 가왕의 품위가 묻어나 있는 '바람의 노래'는 라이브에서 더욱 근사했다.
건반으로 전주를 연주할 때부터 객석에 환호성이 넘친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자연스레 객석에서 떼창이 나왔다. '세렝게티처럼'과 연작으로 불리는 이 곡에서 조용필은 청년성이 깃든 애수 넘치는 목소리를 들려줬다. 특히 20세기를 풍미한 그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라고 울부짖을 때 객석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화룡점정은 지금부터였다. 질주하는 사운드의 '미지의 세계'에선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려줬고 '모나리자'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정체성이 록을 기반으로 삼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왜 조용필이 한국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라고 불리는지를 증명했다. 미국 록 음악의 대부이자 조용필보다 한 살이 많은 스프링스틴도 최근 정규 21집을 냈다. 조용필은 내년 말 정규 20집을 내놓을 예정으로 양국을 대표하는 '국민 가수'들이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은 중장년은 물론 젊은 세대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안겼다.
조용필이 더 놀라운 건 정규 20집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것이다. '세렝게티처럼'과 '찰나' 두 신곡이 실린 '로드 투 트웬티-프렐류드 원'은 타이틀이 의미하듯 20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곡들이다. 칠순이 넘어서 이런 대장정의 여정을 기획하고 그 신호탄 중 하나로 대형 콘서트를 여는 기획력 자체만으로도 조용필은 위대한 가수임을 증명했다.
'모나리자'로 본 공연을 마무리한 조용필은 앙코르에서도 록 페스티벌과도 같은 분위기를 이어갔다. 드디어 "반짝이는 너 흐트러진 나 / 환상적인 흐름이야 / 어쩐지 / 워어! 느낌이 달라"라고 노래하는 '찰나' 순서였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고독한 내레이션을 들려준 조용필은 이 곡에서 경쾌한 '멜로디 랩'을 선사했다.
공연을 정리한 곡은 '여행을 떠나요'. 젊은 로커처럼 폭발적인 기운과 가창, 연주력을 보여준 조용필은 그렇게 20집을 위한 여행의 출정식을 화끈하게 열어젖혔다. 정규 19집 타이틀곡 '헬로'와 이 앨범의 선공개곡인 '바운스'는 들려주지 않았는데 전혀 아쉽지 않았다. 20집을 위한 콘서트의 세트리스트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날 정확히 2시간 동안 23곡을 들려준 조용필의 목소리는 낭창낭창 더 젊었다. 올림픽주경기장 콘서트 등 2010년대 조용필의 서울 모든 콘서트를 지켜봤는데 이날 힘이 빠졌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음을 낮춰 부른 곡도 없었다.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체중이 3㎏가 늘었다는데 더 건강해보였다.
또 '세렝게티처럼'과 '찰나'의 작사에 참여한 김이나가 최근 조용필의 모습을 얼마나 잘 관찰했는지도 목도한 순간이었다. "재미없기로 소문났었던 내가 / 썰렁한 말에 실없이 웃고 많이 들뜨네"라는 '찰나'의 가사는 김 작사가가 조용필의 실제 모습을 토대로 썼다고 했는데, 실제 이날 조용필은 농담도 많이 하고 또 많이 웃었다.
예컨대 이런 말들이다. "여기 오실 때 '저 사람 어떻게 변했을까' 되게 궁금해하실 거 같았어요. 되게 많이 늙었을 텐데 더 말랐을까 살 쪘을까 그런 생각을 하셨겠죠. 근데 저 '확찐'(확진) 받았어요. 살이 3㎏ 확 쪘죠. 그래서 주름살이 없어졌습니다. 하하. 사실 저 (코로나19에) 한번도 안 걸렸어요."
더 짙어진 너스레·유머 감각까지 갖추게 된 조용필은 단지 유명한 가수가 아닌 유일한 아이콘이었다. 이날 객석엔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젊은 층도 꽤 많았는데 정규 19집에 이어 이번 신곡도 젊은 기운을 뿜은 덕분이었다. "오빠"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20~30대 여성들도 꽤 많이 들고 있었다. 모녀끼리 온 관객들도 꽤 많았다. 조용필 팬인 엄마랑 같이 공연장을 찾았다는 20대 후반 김현지 씨는 "K팝을 좋아하는데 조용필 선생님에게서 아이돌 이상의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조용필은 27일과 12월 3~4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콘서트를 이어간다. 이번 콘서트는 총 4만명 규모로 티켓 예매와 동시에 단숨에 매진됐었다.